글번호
126940
작성일
2024.04.26
수정일
2024.04.26
작성자
김광개토
조회수
538

인하대 설립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

인하대 설립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

 

  교정에서 형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던 엄혹한 독재정권하의 1984, 11월 2(오후 3시 비룡탑에서 학생의 날 기념식 및 선배제위 추모제가 열렸고, 4시에는 대동놀이, 6시에는 대운동장에서 폐막식이 거행되었다폐막식 후 400여명의 학생들은 횃불을 들고 교내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인경호 옆에 있던 설립자 이승만 박사의 동상을 쓰러뜨렸다지금 시멘트 받침대만 남아 있는 그곳에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왜 서 있었으며또 왜 그것을 쓰러뜨려야만 했는가?

  설립자를 쓰러뜨린 것인가독재자를 쓰러뜨린 것인가그 양자는 구분되지 않지만 독재자 쪽에 좀더 무게중심이 놓인다당시의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식이 그 원조인 이승만에게로 향한 것이다독재자가 인하대학의 설립에 관여한 것도 못마땅한데 거기에 동상까지 세운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인식이었을 것이다즉 이승만이 독재자였기 때문에 이 학원의 진정한 설립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고그 대신 학생들이 진정한 설립자로 추대하고 동상을 세우고 싶어했던 것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교포들이었다.

  인하대 역사책에 보면하와이 교포들이 이민 5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으로서 조국의 자주독립과 부강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공과대학의 설립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의하고이승만이 1918년 설립하여 운영해온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을 처분한 기금 15만불을 그 설립자금으로 제공하고이를 계기로 하여 1954년 4월 24일 인하공과대학이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인하대학 설립이 하와이 교포들의 제의에 의한 것처럼 보이는데그러나 실제 그 발의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게서 나왔다. 1952년 12월 중순경 이대통령이 피난지 부산에서 김법린 문교부장관에게 인천에 공과대학 설치를 지시하면서 시작되었다그리고 설립의 전 과정과 설립 후의 운영과정에서 이대통령의 지시와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이대통령은 1953년 6월 4일의 담화에서 인하대학 설립은 자신이 처음부터 經營하여 국무회의 의결과 인천시장의 찬성으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교육종교외교적인 차원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고해방 후 한인기독학원의 매각 대금 15만불을 종잣돈으로 하여사실은 이것을 명분으로 삼아, 1903년 1월 하와이로 이민선이 처음 출발한 인천에, 50주년 기념으로 공과대학 설립을 구상한 것이다.

  하와이 이민과 민족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이를 기념한다는 것이 왜 이토록 중요할까이승만은 독립협회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뒤미국으로 건너가 민족운동을 전개할 계획으로 1904년 11, “빠져 나갈 적에 아모 종적없이 만들어가기 위해서 여기 인천에 나와서 이민배를 잡아타고 3등 이민과 한테 섞여서 하와이로 가서 내려가지고 --- 그 이튿날 배를 타고서 미주로 들어가서 워싱톤에 가가지고”(1954년 10월 7일 개교기념식전에서 이승만의 치사민족운동을 하였다고 한다이승만 자신이 스스로를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이민하여 온갖 생활상의 고통 속에서도 민족운동에 물질적정신적으로 헌신한 애국동포애국지사의 대표요 상징이라고 인식한 것이다따라서 하와이 이민 50년을 기념한다는 것은 자신의 하와이에서의 교육운동민족운동을 기념한다는 개인적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며그 결실이 곧 인하대학이었다.

  그러나 인하대학을 설립하기까지 이승만이 지도적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더라도그 이면에는 많은 하와이 교포의 지원과 한국 국민의 성원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이승만은 교육사업을 위하여 교포들로부터 기금을 모금하였는데그것은 가난한 농장에서 번 돈어떤 때에는 떡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팔아서 모은 돈푼이었다고 한다학생고국방문단을 조직하여 국내에서 야구시합 등을 개최하여 모금하기도 하였다뿐만 아니라 인하대학을 설립할 적에 설립자금 총 515만불 가운데정부보조금외국원조기관의 기금그리고 하와이 교포의 기금 15만불 외에국내민간 기부금으로 정부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소속 공무원 봉급에서 5%씩 갹출한 것도 소액이지만 포함되어 있었다심지어는 국민학교 아동들의 성금도 포함되었다고 전해진다그래서 문교부에서는 인하대학의 설립에 거족적인 협력이 있었다고 하였다.

  1954년 10월 7일 인하공과대학 개교기념식에는 그것을 알리는 경축문 좌우에 대한민국만세(大韓民國萬歲)’와 이대통령각하만세(李大統領閣下萬歲)’가 쓰여 있었다기념식은 이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인사가 모두 참석하여 국가적인 행사로 치러졌다이때 이대통령은 내가 이 학교의 이름을 인천과 하와이의 연락을 만드는 기념으로 한다고 해가지고 그 대학을 인하라고 했오.”라고 하여 학교 이름까지 직접 지어 설립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이승만 대통령이 인하대학 설립을 주도하였다는 것은흔히 비난받는 바와 같이 일제시기 다른 민족운동세력과의 사이에서 보인 그의 분열적 독선적 태도나 운동노선의 타협적 성격과는 무관한 것이고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서고 초대 대통령으로서 독재권력을 행사한 것과도 무관한 사실적인 문제이다다만 그의 독선적 자세는 초창기 인하대학의 운영과정에서도 국책적인 기조를 유지한 데서 잘 드러나고그의 퇴장과 함께 인하대학이 큰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던 원인인 것 또한 분명하다.

 

(이영호인문학부 교수사학 전공)

(2003년 4월 인하대학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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